‘킥라니’가 만든 일상의 균열: 인천 송도 사고 이후 우리가 바꿔야 할 것들
걷던 인도로 돌진한 전동킥보드 한 대, 그리고 한 가족의 시간이 멈췄다. 잦아지는 ‘킥라니’ 사고의 실태와 현실적인 해법을, 감정에 기대지 않고 차분히 짚어본다.
사건 개요와 현재 상황
인천 연수구 송도동. 오후 4시 37분 무렵,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고 아이 손을 잡고 나오던 한 엄마가 인도에서 직선으로 돌진하던 전동킥보드에 부딪혔다. 탑승자는 중학생 두 명이었다. 어른 한 명이 탈 수 있는 전동킥보드에 두 명이 올라 탄 데다, 안전모도 없었고 면허도 없었다.
엄마는 몸으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아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엄마는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부딪히며 큰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눈을 뜨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지만, 의식 회복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가족은 병실과 일상을 오가는 마음 졸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건 자체는 안타까움으로 기억되겠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이런 사고가 반복될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나?’
‘킥라니’가 된 이유: 숫자로 본 현실
최근 몇 년간 전동킥보드(개인형 이동장치, PM) 사고는 빠르게 늘었다. 특정 지역 통계를 보더라도 연간 사고가 70건 안팎으로 이어지고, 사망자도 매년 발생해왔다. 적발된 무면허 운행만 해도 연간 수천 건대에 달한다. 숫자에 잡히지 않는 무면허 운행까지 감안하면 체감 위험은 통계보다 더 크다.
이동 수단으로서 전동킥보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가볍고, 가깝고, 빠르다. 문제는 ‘가볍고 빠른’ 장점이 안전에 필요한 절차와 규범을 건너뛰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 청소년층 이용 비중이 높아지면서 면허, 보호장비, 탑승 인원 등 기초 규정을 외면하는 사례가 잦다.
인도 돌진, 야간 무등화 주행, 역주행, 2인 탑승, 신호 위반. 운전자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행자, 특히 아이와 노약자에게 직결되는 위험이다. 그래서 전동킥보드가 ‘킥라니’—예측 불가능하게 튀어나오는 고라니처럼—불리게 됐다.
법은 있는데 왜 막지 못할까
면허 의무와 현실의 간극
법은 명확하다. 만 16세 이상,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 또는 자동차 면허가 있어야 하고, 1인 탑승과 안전모 착용은 기본이다. 그러나 대여 과정에서 면허 확인이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앱에서 계정만 있으면 물리적으로 이용이 가능한 구조가 남아 있거나, 계정 공유로 무면허가 우회된다.
단속이 잡지 못하는 회색지대
단속은 사후적이다. 현장에서 경찰이 적발해야 하지만, 도심 곳곳에 흩어진 PM을 상시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이때 빈틈을 메워야 하는 것이 ‘대여 단계에서의 인증’이다. 본인인증+면허인증+실사 사진 업로드까지 거치게 하면 허점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보험과 책임 구조의 문제
사고가 나면 피해자 보호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용자 개인의 임의 가입 구조에 기대는 보험 체계는 피해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 의무 가입형 책임보험과 사업자 책임의 명확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도시 인프라의 빈틈: 인도·차도 어디에 둘 것인가
도시 공간에서 전동킥보드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분명한 답이 없다. 자전거도로가 충분하지 않은 구간에서는 인도와 차도 사이를 오가며 위험을 키운다. 보행 밀도가 높은 상가 밀집 인도에선 속도를 줄여도 충돌 위험이 크다.
전용 주행 공간과 감속 설계
현실적인 해법은 두 가지다. 첫째, 보행우선 구간에서는 속도 자동 제한(지오펜싱 기반)을 도입해 8~10km/h 수준으로 낮춘다. 둘째, 자전거도로와 공유 가능한 구간에서는 차도와 분리된 물리적 방호(연석, 볼라드)를 더해 시각적·물리적 경계를 명확히 한다.
정류장식 주차와 시각적 질서
차량이 눈에 보이는 질서 안에 있을수록 사람의 행동도 달라진다. 보행 동선과 겹치지 않는 ‘정류장식 주차존’을 촘촘히 마련하고, 무단 방치에는 즉시 회수·과금을 적용하면 인도 혼잡과 돌발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용 문화와 책임: 청소년, 보호자, 사업자
청소년 이용의 현실
청소년이 PM에 익숙한 이유는 간단하다. 친구들과 이동이 편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는 책임을 대신하지 않는다. 보호자 관여가 약한 시간대(하교 이후, 주말 오후)와 학교 주변, 상가 밀집 구역에서 위험도가 올라간다는 점은 이미 체감된다.
보호자와 학교의 역할
가정과 학교는 첫 번째 안전 교육 현장이다. 구체적으로, 1) 무면허 운전의 법적 책임, 2) 2인 탑승의 충돌 메커니즘(제동거리 증가, 중심 쏠림), 3) 안전모의 실제 효과(두부 외상 감소)를 눈높이에 맞춰 반복적으로 알려야 한다. 단순 경고가 아니라,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왜 위험한지’ 이해시키는 게 중요하다.
사업자와 플랫폼의 책임
앱 단계에서의 강력한 인증, 야간 자동 감속, 보행 밀집 시간대 제한, 이용 전 안전 퀴즈 통과, 헬멧 대여·판매 연계 같은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이용자 경험을 해치지 않으면서 안전을 기본값으로 만드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사고를 줄이는 실천 가이드
개인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통계는 달라진다. 아래 체크리스트는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유효하다.
전동킥보드 이용자 체크리스트
- 면허·본인 인증 확인: 계정 공유 금지, 앱 내 인증 최신 상태 유지
- 안전모 필수: 턱끈까지 제대로 잠그기, 야간에는 반사 스티커 추가
- 1인 탑승 원칙: 2인 탑승은 제동거리와 무게중심을 망가뜨린다
- 보행 밀집구간 감속: 사람 많은 인도에서는 내려 끌기
- 우회전·골목 진입 전 정지: 시야가 가려진 곳은 서서 확인
- 이어폰·폰 시선 금지: 한쪽만 끼거나 완전히 빼고 주행
- 비·눈길 주행 자제: 미끄럼과 제동거리 급증
보행자·보호자 체크리스트
- 아이와 보행 시, 바깥쪽 보호: 차도와 가까운 쪽에 보호자 위치
- 모서리·골목 앞 멈춤 습관: 킥보드는 조용해 접근 소리를 놓치기 쉽다
- 유모차·어르신 동행 시, 인도 가장자리 피하기: 상가 출입구 동선 겹침 주의
- 야간 밝은 복장·반사소재 활용: 시인성만 높여도 위험이 낮아진다
정책 제언: 당장 가능한 것부터
거창한 플랜보다 즉시 효과를낼 수 있는 조치를 모았다. 순서는 비용 대비 효과를 기준으로 삼았다.
1) 앱 강제 인증 고도화
- 면허 OCR+실사(face liveness) 조합, 주기적 재확인
- 청소년 시간대 제한(야간), 학교·학원가 지오펜싱 감속
2) 의무 보험과 피해자 지원
- 대여형 PM 의무 책임보험 일괄 가입, 약관 표준화
- 피해자 의료·법률 지원 원스톱 창구 마련
3) 물리적 인프라
- 보행우선구역 표지+바닥 시인성 강화, 감속 유도턱
- 자전거도로 연속성 확보, PM 공용 구간 명확표시
- 정류장식 주차존 확대, 무단 방치 즉시 과금
4) 교육과 캠페인
- 학교 정규 안전교육에 PM 모듈 도입(시뮬레이터 포함)
- 보호자 대상 ‘계정 공유 금지’ 가이드 배포
해외 사례 비교와 시사점
유럽 주요 도시는 초기의 혼란을 지나 ‘조건부 허용’으로 정리되는 추세다. 일부 도시는 면허가 아닌 ‘교육 이수+퀴즈’로 대체하되, 지오펜싱 감속과 주차존 의무화를 강하게 적용한다. 특히 파리의 경우 공유킥보드 퇴출이라는 강수 이후, 민간·도시가 함께 보행 안전을 최우선으로 재설계했다. 해법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용 편의보다 안전이 먼저라는 것, 그리고 플랫폼 기술이 안전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것.
우리 도시에 그대로 옮기긴 어렵지만, 감속·주차·보험·교육의 네 축을 동시에 강화하면 체감 안전은 빠르게 개선된다.
결론: 속도를 줄이면 보이는 것들
송도의 그 사건은 어느 도시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전동킥보드는 이미 우리의 이동 생태계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편리함을 안전하게 사용할 의지가 있는가.
속도를 줄이고, 규칙을 지키고, 책임을 나누면 풍경이 달라진다. 도로 위의 예측 가능성이 올라갈수록,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가 한 박자 늦게라도 집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아진다. 가족의 일상은 그런 작은 차이들 위에 서 있다.
오늘만큼은, 킥보드를 잡기 전 10초만 더 생각해보자. 내 앞의 사람, 내 옆의 아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