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총리 별세: 식민 지배 사죄 남긴 ‘담화의 총리’, 101세로 생을 마감하다
일본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사회당 출신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눈을 감았다. 그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침략과 식민 지배를 공식 인정·사죄하며 동아시아 외교의 기준점을 세웠다.
1. 별세 소식과 기본 정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가 향년 101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회당(후에 사민당) 출신으로 일본 제81대 총리를 지낸 그는, 전후 50년을 맞던 해에 일본 정부 수반의 이름으로 과거 침략과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반성·사죄의 뜻을 밝힌 인물로 널리 기억된다.
그의 별세는 일본 국내 정치권은 물론, 한국과 중국, 동남아 각국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지 한 정치인의 퇴장이 아니라, ‘사과의 언어’를 공식 외교의 문장으로 끌어올린 사람의 시대적 퇴장이라는 의미가 겹친다.
2. 누구였나: 성장 배경과 정치 입문
무라야마는 일본 규슈 오이타에서 태어나 전후 혼란 속에서 정치를 접했다. 지역 의회에서 기반을 다진 뒤 중앙 정치로 올라선 전형적인 ‘밑바닥형’ 정치인이다. 특정 파벌의 울타리보다 생활 현장과 노동 문제에 눈을 둔 성향이 강했고, 이 점이 훗날 총리 재임 중 위기 대응과 역사 문제에서 드러난 ‘담백한 어조’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그의 화법은 유려하기보다는 직선적이었다. 과도한 수사보다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고,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에 방점을 찍는 방식이었다. 일본 정치 특유의 모호한 표현을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에도 꽤 이례적인 지도자였다.
3. 집권의 배경: 연립 정권과 시대 분위기
1990년대 중반 일본 정치는 재편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버블 붕괴 이후 경제가 얼어붙고, 기존 보수 중심 구도가 흔들렸다. 그 틈에서 사회당, 자민당, 사키가케 등 이질적 세력이 손을 잡는 연립 구도가 성립했다. 정치적 안정이라는 현실적 목적과, ‘전후 50년’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라는 상징 과제가 정권 운영의 핵심 축이 됐다.
무라야마는 이 연립의 균형추로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가 선호했던 합의 중심의 운영 방식은 때로는 굼뜨게 보였지만, 정쟁의 수위를 낮추고 제도적 결정을 끌어내는 데에는 일정한 효과를 냈다. 바로 이 합의 정치의 프레임에서, 훗날 ‘담화’가 내각 전체의 이름으로 자리 잡을 환경이 조성됐다.
4. ‘무라야마 담화’의 의미와 문맥
전후 50주년을 맞아 발표된 담화는 일본이 과거 침략과 식민 지배로 주변국에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을 명확히 언급하고, 이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문서다. 표현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조정됐고, 최종적으로는 총리 개인의 견해를 넘어 내각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담화는 국내 정치적으로는 보수 진영의 반발을 불렀고, 외교적으로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서 신중한 환영과 지속적인 이행 요구를 동시에 받았다. 즉, ‘문서로서의 사죄’가 만들어졌지만, 그 문서를 정치와 교육, 외교의 실천으로 옮기느냐는 과제가 남았던 셈이다.
5. 정책과 사건: 재임기 일본 사회의 격동
무라야마의 재임기는 유난히 사건이 많았다. 대지진과 대형 범죄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부의 재난 대응 체계와 공공 안전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올랐다. 초동 대응의 미흡함, 중앙-지방 간 조정 문제, 자원 배분의 경직성 등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경험은 이후 일본의 방재 매뉴얼과 위기관리 사령탑 개편 논의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무라야마 스스로도 ‘정부가 무엇을 약속하고 어떻게 책임지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더 분명히 하게 되었고, 이것이 담화의 언어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6. 사죄 이후의 실천: 기금, 편지, 교류
담화는 시작이었다. 피해자 지원과 기억의 보존을 위한 기금 조성, 개인적 서신을 통한 사과 표현, 시민사회와의 교류 확대 등 사후 조치들이 이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부 예산의 직접 보상’이 아닌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의 경계가 논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에서 행동으로’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외교 현장에서, 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거듭 같은 메시지를 반복했다. “역사를 외면하면 미래의 외교도 없다”는 것이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7. 평화헌법과 우경화 비판
퇴임 뒤에도 그는 평화헌법의 가치를 꾸준히 강조했다. 군사적 역할 확대를 당연시하는 흐름에 대해, 헌법의 정신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보 환경이 변화한다는 이유로 ‘원칙’을 수정하는 순간, 전후 일본이 쌓아 올린 신뢰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논지였다.
이런 목소리는 일본 내부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 받아들여졌고, 한국에서는 ‘담화의 진정성’을 지키려는 태도로 비교적 우호적으로 해석되었다. 그에게 평화헌법은 단지 조문이 아니라, 전후 일본 사회의 자기 확인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었다.
8. 한국에 남긴 파장과 외교적 유산
한국 사회에서 무라야마의 이름은 ‘담화’와 거의 동의어다. 사과를 요구할 때 인용되는 기준점, 교과서 기술의 방향을 가늠할 척도, 양국 관계가 흔들릴 때 떠올리는 마지노선이 바로 이 담화였다. 이후 정권들이 ‘계승’을 언급하거나, 반대로 문구를 희석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한국의 여론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 넓게 보면, 그의 유산은 사과의 언어를 외교의 언어로 가져왔다는데 있다. 말과 문서가 실천을 담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실천이 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설정했다. 바로 그 점에서, 그의 별세 소식은 과거사가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새삼 상기시킨다.
9. 평가가 엇갈린 지점과 그럼에도 남은 것
비판도 적지 않았다. 연립 구조 속 총리 권한의 제약, 재난 대응의 한계, 보수층의 신뢰 부족 등은 그의 지지 기반을 흔들었다. 또한 사죄의 형식과 실질 사이의 간극—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의 차이—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정치인의 업적을 평가할 때 단기 성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가 남긴 것은 하나의 ‘문장’이자, 그 문장이 지닌 ‘기준’이다. 일본의 공식 어휘 속에 침략과 식민 지배를 또렷이 적어 넣은 지도자는 많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충분하다.
10. 기록으로 보는 연표
총리 재임의 시간표는 짧았지만, 그 속에서 남긴 결정은 길다. 특히 담화의 문구는 이후 일본 정부 수반들의 발언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거나 준거로 삼아졌고, 아시아 각국의 외교적 메시지를 이끄는 기준으로 기능했다.
11. 오늘 우리에게 주는 질문
무라야마의 별세는 단지 과거 인물에 대한 추모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사 문제를 ‘끝난 이야기’로 미루지 않고, 교육·외교·시민사회의 언어로 이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사과가 반복될 때 비로소 일상이 되고, 일상이 되어야 관계의 체질이 바뀐다.
한국 사회에도 숙제가 있다. 상대의 변화를 촉구하는 한편, 우리가 기억을 관리하는 방식 역시 성찰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한 교육, 피해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제도, 냉정한 외교 전략이 함께 가야 지속 가능한 관계가 가능하다.
12. 마무리: 사과의 정치, 기억의 책임
그가 떠난 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그 공백을 메우는 방법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준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사과의 언어를 공적 기록 속에 남기고, 실천으로 뒷받침하며, 다음 세대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무라야마가 남긴 가장 실용적인 유산이다.
우리는 때로 과거를 말하는 일이 현재를 늦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다. 과거를 정직하게 적는 일이야말로, 미래를 더 빨리 움직이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그가 만든 문장을, 우리의 내일로 옮겨 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