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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재점화…발언 논란과 학계 평가, 왜 다시 떠올랐나

2025년 12월 15일 · 5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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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발언을 계기로 ‘환단고기’가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섰습니다. 학계가 이를 위서로 보는 근거, 대중 논쟁이 반복되는 배경, 그리고 우리가 역사 자료를 읽을 때의 기본 원칙을 차분히 정리했습니다.

1. 무엇이 논쟁을 촉발했나

발단은 한 공식 업무보고 자리에서 나온 ‘환단고기’ 관련 언급입니다. 이후 대통령실이 “동의나 연구 지시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이미 공론장은 뜨거워졌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냥 말실수로 정리하면 될 일을 해명이 키웠다”고 지적했고, 해명 과정에서 ‘문헌’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며 논쟁의 초점이 ‘문헌 인정 여부’로 확장됐습니다.

정치적 공방은 빠르게 감정선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역사 문제는 감정보다 절차가 중요합니다. ‘무엇이 사실인가’보다 먼저 ‘어떻게 사실을 확인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번 글은 그 절차를 독자와 함께 차분히 복기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2. ‘환단고기’란 무엇인가: 구성과 주장

‘환단고기’는 통상 다섯 부로 구성된 상고사 서술을 표방합니다. 큰 흐름은 고대의 한민족이 광활한 유라시아로 활동 무대를 넓혔고, 정치·문화적 중심성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출간·필사 전승의 계보로는 20세기 초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상고 제왕 계보’ 같은 도식을 통해 문명의 기원을 재배치하려는 시도가 눈에 띕니다.

대중에게 와닿는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더 위대했다”는 정체성의 감정적 보상,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황량한 상고의 빈칸을 채워 준다는 만족감, 그리고 도전적 서술이 주는 서사적 매력이 그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학술과 대중 심리는 자주 엇갈립니다.

3. 왜 학계는 위서로 판단했나

주류 역사학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본 가장 큰 이유는 사료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문헌의 연대·전승·언어·교차근거가 맞물리지 않습니다. 20세기적 표현과 개념이 고대 텍스트에 비정상적으로 스며들어 있고, 특정 시대 이후에나 통용되는 어휘·문체가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독립된 1차 자료와의 교차 검증이 부족합니다. 고고학·금석문·동시대 외국 기록과 비교할 때 상호 보완이 아니라 충돌하는 대목이 잦습니다. 역사는 단일 텍스트가 ‘모든 것’을 설명할 때 오히려 경계합니다. 하나의 문헌이 방대한 문명사를 혼자 지지한다면, 그 자체가 검증 과제로 떠오릅니다.

셋째, 판본 계통과 출처 이력의 투명성이 떨어집니다. 학술 연구는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옮겼는가’를 꼼꼼히 따라갑니다. 전승 고리의 공백이 크고, 그 공백을 메우는 증거 체인이 불충분합니다. 이런 이유로 학계는 오랜 기간 ‘위서’라는 결론을 유지해 왔습니다.

4. 대중 담론에서 반복되는 패턴

흥미로운 점은 논쟁이 주기적으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정체성 서사, 즉 “우리의 잃어버린 영광” 같은 표제가 등판하면 클릭과 관심이 몰립니다. 정치적 발언 하나가 불씨가 되고, 해명 대목에서 단어 선택이 엇나가면 화제가 증폭됩니다. 소셜 미디어는 이런 주제를 빠르게 감정화하고 ‘우리 대 그들’의 구도로 단순화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장에서 전문성의 발언이 자주 소음에 묻힌다는 점입니다. 사실 확인보다 ‘스탠스 표명’이 더 높은 보상을 받을 때, 사료 검증의 정석을 설명하는 목소리는 길게 말해도 주목받기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기본기를 확인하는 글이 필요합니다.

5. 문헌을 판단하는 기본 원칙: 사료비판의 5요소

5-1. 연대 검증

문헌이 주장하는 제작 시기와 내부 증거(어휘, 문체, 개념, 사건 인식)가 맞아야 합니다. 시대착오적 표현이 반복되면 경고등이 켜집니다.

5-2. 전승 계보

누가 어떤 경로로 필사·간행했는지, 판본의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핵심입니다. 빈 구간이 길수록 보수적으로 접근합니다.

5-3. 교차 근거

동시대의 외부 기록, 고고학적 발견, 금석문, 지명·언어 증거가 서로 맞물리는지 봅니다. 단일 문헌이 홀로 거대한 주장을 떠받치면 신뢰도는 낮아집니다.

5-4. 내적 일관성

문장 내부의 호칭, 연호, 제도, 지리서술이 문헌 전반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점검합니다. 작은 균열도 반복되면 치명적입니다.

5-5. 외적 비평

문헌을 언급하는 동시대·근접시대 타 자료의 평가, 책의 존재를 증명하는 시대별 기록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나만 아는 고서”는 낭만적이지만, 학술적으로는 근거가 얕습니다.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믿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증거를 따라가자는 것. 역사학의 미덕은 신중함입니다.

6. 교육 현장에서의 대응: 논쟁을 가르치는 법

학교나 시민 강좌에서 ‘환단고기’를 다루는 방식은 단죄나 선동이 아니라, 사료비판 훈련의 사례로 삼는 것입니다. 각각의 주장 문장을 추천·반대의 정서로 평가하기보다, 증거의 유형과 강도를 함께 표시해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수업에서 다음과 같은 연습을 합니다. “문장 A—교차 근거 없음(0/3), 연대 적합성 불충분(1/3), 내적 일관성 약함(1/3)”. 숫자는 절대값이 아니라 대화의 장치입니다. 학생들은 이 과정을 통해 ‘검토의 언어’를 배웁니다.

또한 ‘왜 이런 이야기가 매력적인가’를 토론합니다. 정체성 욕구, 상실감의 보상, 영웅 서사의 흡입력, 콘텐츠 플랫폼의 노출 구조까지. 판단을 늦추고 맥락을 먼저 보는 습관이 길러집니다.

7. 과학과 신화, 경계가 흐려질 때 생기는 일

현대의 이야기들은 종종 과학의 외양을 빌립니다. 수식과 지표, 그래프, 전문 용어.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문제는 용어가 증거를 대체할 때입니다. ‘그럴듯함’은 근거가 아닙니다. 숫자 역시 맥락을 떠나면 수사에 불과합니다.

역사 논쟁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됩니다. 한 문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해외 학자도 인정했다”는 보편주의 카드가 등장하고, 통계·지도·계보도가 비주얼로 힘을 보탭니다. 하지만 그 자료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려졌는지, 레이어의 출처가 투명한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한 번만 소스를 더듬어 가도 허술한 고리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8. 인터넷 시대의 역사 소비: 알고리즘과 확증편향

검색창에서 ‘환단고기’를 입력하면, 플랫폼은 당신의 체류와 클릭을 늘릴 조합을 보여 줍니다. 자극적인 제목, 확신을 주는 톤, 반대 의견을 조롱하는 밈. 그 사이에서 차분한 검토 글은 잘 뜨지 않습니다. 이는 당신의 관심을 탓할 일이 아니라, 플랫폼의 목표가 ‘정확성’이 아니라 ‘체류 시간’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확증편향은 여기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미 믿고 싶은 방향의 콘텐츠를 더 많이 보게 되고, 반대 증거는 불편한 노이즈로 처리합니다. 이때 필요한 건, 나와 다른 주장의 ‘최선의 버전’을 먼저 찾아 읽는 습관입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을 상대해 보는 것, 그게 견고한 판단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9. 우리가 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

  • 출처 3단계 거슬러 올라가기: 원문-번역-요약 중 어디에 서 있는가를 확인합니다.
  • 판본과 연대: 문체·어휘의 시대 적합성을 지적하는 연구가 있는지 찾아봅니다.
  • 교차 근거 지도 그리기: 고고학·금석문·외국 사료와 맞물리는 지점을 표로 정리합니다.
  • 전문가 합의의 방향: 단일 권위가 아니라 ‘다수의 독립적 검증’이 일치하는지 봅니다.
  • 반증 가능성: 주장이 틀렸을 경우 관찰될 수 있는 신호가 무엇인지 스스로 적어 봅니다.
  • 정체성 보상 요소 분리: ‘좋아 보이는 이야기’와 ‘사실’의 경계를 의식적으로 나눕니다.

이 체크리스트는 ‘환단고기’만이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어떤 역사 서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도구입니다.

10. 맺음말: 차분한 질문이 해답을 부른다

이번 논란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줍니다. 첫째, 공적 발언의 무게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둘째, 해명 과정의 단어 선택이 왜 중요한지 보여 주었습니다. 셋째, 무엇보다 역사 문헌을 다루는 기본기를 대중적으로 복습할 시간을 열어 주었습니다.

역사학의 핵심은 ‘확신’이 아니라 ‘검증’입니다. 한 문헌을 둘러싼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시 멈추고, 연대·전승·교차근거라는 세 개의 발판 위에 다시 올라서 봅시다. 거기서부터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생각보다 단단합니다.

#역사논쟁 #사료비판 #공적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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